‘새가슴’ 즈베레프를 어찌하오리까?[박준용 인앤아웃 In AO]
작성자 정보
- 토도사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8 조회
- 목록
본문


열렬한 응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마음이 가는 선수가 있을 겁니다. 필자에게는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 3위)가 그런 선수입니다.
필자가 즈베레프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14년 호주오픈을 취재할 때였습니다. 당시 주니어였던 즈베레프는 8강에서 정현과 대결했는데 서브, 스트로크(특히 백핸드), 네트 플레이까지 주니어답지 않은 플레이를 보고 당장 프로 무대에서도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정현과의 경기 결과는 즈베레프 승리였습니다).
뛰어난 기량에 아버지를 닮지 않은 훈훈한 외모(?)까지 갖춘 즈베레프는 그야말로 준비된 스타였습니다.
주니어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즈베레프는 투어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며 단숨에 세계 10위 내에 진입해 톱랭커로 자리 잡았습니다. 도쿄올림픽 단식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그랜드슬램 타이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저 페더러(스위스), 라파엘 나달(스페인),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가 호령한 무대에서 즈베레프가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나달과의 악연이 가장 뼈아픕니다. 2022년 롤랑가로스 4강 당시 즈베레프는 나달을 상대로 생애 최고의 경기를 펼치며 첫 세트부터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경기 도중 발생한 끔찍한 발목 부상은 그의 꿈을 앗아갔고 결국 기권패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조코비치는 그에게 거대한 통곡의 벽이었습니다. 2021년 즈베레프가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시기, 호주오픈과 US오픈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조코비치는 즈베레프의 서브를 무력화하며 그의 앞길을 막아섰습니다. 비록 지난해 호주오픈에서 조코비치를 꺾으며 뒤늦은 설욕에 성공했지만 결승에서 신네르에게 패하며 빛이 바랬습니다.
여기에 도미니크 팀(오스트리아), 다닐 메드베데프(러시아), 스테파노스 치치파스(그리스)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페더러와 나달이 은퇴하고 조코비치의 전성기가 지나자 다음 그랜드슬램 우승 트로피는 즈베레프가 차지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세대교체의 틈새는 짧았습니다.
빅3가 코트를 비우기 무섭게 이번에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카를로스 알카라스(스페인)와 야닉 신네르(이탈리아)가 등장해 테니스계를 평정해 버린 것입니다. 즈베레프에게는 ‘그랜드슬램 챔피언’이 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어느덧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낀 20대 후반의 베테랑이 됐습니다.
이번 호주오픈에서도 즈베레프는 알카라스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그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세트에서 알카라스가 오른 허벅지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해 그에게 기회가 오는 듯했지만 다소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친 것이 아쉬웠습니다.
알카라스가 부상으로 인해 ‘마치 잃을 것이 없다’라는 식으로 짧고 강력한 샷을 날릴 때 즈베레프가 오히려 당황하며 자신의 리듬을 잃었습니다.
또한, 알카라스는 네트 대시 빈도를 늘리며 승부수를 띄웠는데 즈베레프는 이를 차단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베이스라인 뒤에만 머문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5세트 게임 스코어 5-4로 리드한 상황에서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지키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알카라스의 메디컬 타임아웃을 두고 즈베레프가 “경련(Cramp)인데 왜 치료를 허용하느냐?”라며 체어 엄파이어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경련으로는 메디컬 타임 아웃을 요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이 논란은 승패의 본질이 아닙니다. 즈베레프는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3세트와 4세트를 따내 승부를 5세트로 끌고 갔고 심지어 5세트 시작하자마자 브레이크에 성공하며 승기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논란에 흔들렸다기엔 그는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지만 그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즈베레프의 가장 큰 단점은 ‘새가슴’입니다. 중요한 포인트에서 서브 토스가 흔들리거나 지나치게 방어적인 서브를 넣어 리턴 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큰 대회에서 더블 폴트가 쏟아져 나오며 스스로 무너지는 패턴이 반복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4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제 즈베레프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빅3’가 물러난 자리를 알카라스와 신네르가 완벽히 점령했고 그 아래로는 더 어린 신성들이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즈베레프가 이 ‘뉴 빅2’의 견고한 벽을 뚫고 그랜드슬램 우승을 차지할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필자는 여전히 즈베레프에게 기대를 걸어봅니다.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라는 한 문장으로 기억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재능이기 때문입니다. ‘새가슴’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그랜드슬램 정상에서 환하게 웃는 그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박준용 테니스 칼럼니스트(loveis5517@naver.com), ENA 스포츠 테니스 해설위원, 아레테컴퍼니(주) 대표>
관련자료
-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