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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일지 1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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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일지 10부


"영선아..."


나는 재차 불렀다.


"말씀하세요"


그녀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어떤 감정을 억누르려 한다는걸 알수 있었다. 그것이 증오의 감정인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늘은 괜찮니? 괜찮으면 나하고 같이 내가 말한 그 모델에이젼시에 가봤으면 하는데..."

"....."

"괜찮니?"

"....그러죠..."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도 혼자가긴 좀 뭣한 기분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녀가 나와 동행하는걸 승락했다. 이건 좋은 징조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극구반대하는걸 나는 그녀집앞까지 내차를 가지고 그녀를 데리러 가겠다고 우겼다. 지난번에 직장 10부제에 걸려 그녀를 바래다주지 못한것은 차라리 잘된일이었다. 그날밤 내차에 타라고 했으면 분명 안탔을 테니까. 내차에 타고 시내로 나오는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녀의 분위기가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하긴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몹쓸짓을 한사람의 차를 탄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에이젼시까지 가는 줄곧 내가 옛날 읽었던 한 사건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납치사건이었는데 납치된 여자는 미국의 어떤 신문재벌의 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납치된지 몇개월(몇개월인지 1~2 년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다) 지난후 그 납치범들과 한패가 되어 은행강도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이사건은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파를 일으켰었다. 납치된 사람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납치범에게 심리적으로 의존 내지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납득이 잘가지 않을수도 있지만 납치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납치범이 자기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극한의 권력자인 셈이다. 따라서 납치된사람은 살아남기위해 납치범에게 무조건 복종해야하고 하루 24시간 일거수 일투족이 납치범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면 육체 뿐만아니라 심리적으로까지 복종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행동이 극도의 불일치를 보이는 상태를 오랜기간 참아내지 못한다. 어느쪽으로건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방향으로 갈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몸과 마음의 긴장이 낮아지는 방향, 즉 복종하는 방향으로 가려하는 것이다. 더구나 목숨이 바로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이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도 복종하는수 밖에는 없는것이다. 만약 그런 심리상태를 그녀에게 적용해 본다면, 그녀의 마음속에 내게 대한 어떤 복종심리가 있지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쨋건 우린 그 모델에이전시까지 가서 매니저를 면담했다. 녀석은 나보다 2살이 위인데도 나더러 형님 형님 했다.


"아니 형님 어디서 이런 물건하나 주워왔수?"

"주워오다니, 말조심해..."


나는 그녀를 곁눈질로 보고 녀석에게 내성질대로 한바탕 욕을 해댈려고 하다가 참았다. 그녀에게 다시 저속한 놈으로 보여선 안되니까.


"어때? 좀 밀어줘, 내겐 친척뻘되는 동생이야"

"에이, 이건 아니고?"


녀석은 새끼 손가락을 세우면서 이죽거렸다.


"이사람이 정말..."

"알았어요, 아가씨, 잠깐 저리로 가서 좀 봅시다."


녀석은 영선을 데리고 워킹룸으로 가서 이리저리 둘러봤다. 나는 녀석의 눈이 심상치 않다는걸 알았다. 입이 쩍 벌어져 가지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소문난 바람꾼인데다가 부잣집 아들이고 생긴것 마져 여자꽤나 후리게 생겼기 때문에 나는 저으기 걱정이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걔밑에 있는 애들중에 몇몇이 녀석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데 자신은 절대 자기애들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잡아떼곤 했다. 난 사실 리버럴리스트이다. 성적이건 사상적이건. 그래서 성도 공유할수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그녀만큼은 공유란 개념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그런 녀석하고는.


"흠...키가 좀 걸리기는 한데, 사실 패션모델할려면 170은 넘어야 되거든요, 지금 잡지 카탈로그 찍는 애가 있는데, 그건 충분히 할수 있겠어요"


녀석은 왠일인지 별로 칭찬을 하지 않는것이었다. 나는 녀석의 속셈이 짐작이 갔다. 하지만 안될말...


"그럼 일단 그걸 하기로 하지, 어때요 영선씨?"


나는 속으로 아차했다. 동생이라면 영선아 하고 불러야 되는데

영선씨 했으니 녀석에게 들켜버린것 같았다. 녀석은 빙그레 웃고 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선인 사실 모델일이 희망은 아니고 다만 지금 일자리가 필요해서 그래, 그러니까 잘좀 알아서 해줘"


내가 보기에 그녀는 모델일 같은건 별로 적성에 안맞아 보였다. 이바닥으로 나설려면 적당히 야심있고 꽤 공격적이어야 되는 걸로 알고있다.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보기에 성격이 모질지 못하고 무르다. 잘 거절하지 못하고착한 성격이다. 차라리 집에서 살림하거나 공부를 계속하는게 맞을 지도 모른다.


"그럼 언제부터 일할수 있나요, 영선씨?"


녀석이 물었다.


"카탈로그 촬영이 낼 있는데 청평에서, 그럴려면 오늘 의상 테스트도 하고 할일이 많아요"

"오늘 괜찮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오케이, 그럼 형님은 바쁘실텐데 가보셔도 되요, 아마 저녁늦게 끝날거예요, 그럼 우리먼저 나가보죠, 점심은 먹었죠? 영선씨?"


그녀와 녀석은 방을 나갔다. 그녀는 나가면서 날 슬쩍한번 쳐다봤다. 나는 그녀를 보고 웃어주었다. 나는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사무실을 나왔다. 달리 할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 몰래 의상테스트하는곳엘 갔다. 녀석은 카탈로그촬영이 뭐 대단한 일이 아닐텐데도 그곳에 있었다. 여러사람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그녀가 보였다. 약간 긴장한 얼굴이지만 너무도 청순하게 보였다. 녀석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시간보낼 궁리를 했다. 밤 8시쯤 녀석에게 전화를 하니 아직 안끝났단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무료한 시간을 죽일수가 없어서 빌딩앞으로 갔다. 때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차에서 내리려 할때, 헤드라이트불빛이 보이고 차가 한대 빌딩 출입문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그녀가 현관에서 나왔다. 나는 반가와서 얼른 그녀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차에서 녀석이 나와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런 썩을놈, 아직멀었다더니' 나는 그녀에게 차문을 열어주면서 타라고 권하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씩 웃어주었다. 그녀는 웃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반가운 표정을 지을락 말락했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너무나 행복해지는 기분이어서 녀석에게 한바탕하려던 계획을 잊어버렸다.


"아, 이제 끝났어?" 내가 말했다.


녀석은 날 보더니 똥씹은 표정을 지었으나 얼른 인사를 했다.


"어, 그럼 형님이 바래다 주시면 되겠네요....잘가요 영선씨...낼 아침 8시까지 나오는거 잊지마세요, 안녕"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어땠어요? 힘들지 않았나요?"

"예, 조금...안바래주셔도 되요, 저혼자 갈수있는데요"


그녀가 한결 상냥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예"

"그럼 내차를 타세요 바래다 드릴게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걸어가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녀는 몇번 사양하다가 결국 내차에 탔다. 나는 묵묵히 운전했다.

마음같아서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시시콜콜 다 물어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저...아저씨...술한  ? ?사주실래요?"


가만히 앞만 보고있던 그녀가 앞을 향한채로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이럴수가...  ? ご?너무 기뻐서 운전대를 놓칠뻔했다. 이건 그녀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다는 의미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다.


"아...당연히 사야죠, 피곤한덴 술한잔이 그만이죠, 무슨술로 할깝쇼?"

"소주요..."


우리는 차를 돌려 근처 유료주처장에다 세우고 포장마차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굳이 포장마차를 가자고 하는것이다. 마침 한군데를 발견하고 들어가서 우동과 소주를 주문했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내가 따라주는데로 단숨에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금방 한병이 바닥 났다. 옆에 앉은 대학생처럼 보이는 애들이 말없이 술을 털어넣고 있는 그녀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워낙에 미인인 그녀가 술을 그렇게 원샷하는 광경이 녀석들에게 신기했나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나는 그녀가 얼마나 취했는지 알수가 없었다. 두병째가 반쯤 비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큰소리로 엉엉 울기시작했다.


"이 나쁜자식아~" 그녀가 울면서 나를 보고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까 완전히 맛이 간 얼굴이었다. 나는 또다시 한잔을 털어 넣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놔~ 이거 놔~" 그녀가 완전히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영선아!, 정신차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나갈려고 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버텼다.

"이 나쁜새끼야~~" 그녀는 악을 써댔다. 옆에 앉은 학생들이 우리쪽을 보고 당장이라도 그녀를 구원하러 올 태세였다.


"너 그렇게 나랑 하고 시펐니? 그럼 말하지 그랬어?"


그녀가 듣기에 민망한 소리를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나는 그녀를 포장마차에 데리고 온걸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포장마차에 있던 꽤 많은 손님들이 모두들 흥미로운 눈초리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영선아, 정신차려, 나가자 이제~" 나는 술값을 지불하고 억지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왜 날 강간했니? 이 나쁜놈아~!!" 나는 가슴이 뜨끔해서 그녀의 입을 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비가 아직도 추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행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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